못했다. 불신앙과 신실하지 못함 때문이었다. 복음을 듣고 잠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서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. 끝까지 신실함이 복음에 합당한 믿음이요,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다. 조상들의 실패는 오늘을 위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지만 때로 두려움과 좌절의 이유도 된다. ‘그분들이 못한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? 결국 그들처럼 우리도 실패하지 않을까?’ 이런 두려움에 응답하듯 설교자는 회중에게 “이미 믿고 있는 우리는 쉼에 들어갑니다”라고 확언한다(3상반절). 3중반절에서 한 번 더 심판의 선언(시 95:11)을 인용하면서 신앙과 불신앙의 결과가 얼마나 다른가를 강조한다. 부사 ‘카이토이’(kaitoi)를 사용한 3하반절의 전환은 다소 파격적이다(번역 주 참조). 이제껏 시편 95편을 중심으로 출애굽과 광야 여정을 다루어 오다가 여기서 창세기 2장 2절을 인용하면서 태초의 창조와 안식을 거론하기 때문이다. 시편 95편과 창세기 2장 사이의 연결고리 하나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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